밀리시타 게임 외 번역/2차 창작 번역

2차 창작 소설 번역 : 15th summer

라인슬링 2020. 11. 3. 10:41

15th summer

원작 : Davy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3529851

 

 

 

 

1

 

그녀는 등 뒤로 푸른 하늘을 짊어지고 있었다.

", 스트레이트부터 간다!"

마운드 위에 선 소녀, 나가요시 스바루는 오른발을 깊이 내딛으며 글러브에 품은 오른손을 앞으로 곧게 뻗었다.

그리고 뻗은 오른팔을 돌려 그 기세로 온 몸을 회전시키며 중심을 앞으로 이동시킨다.

쓰러질 듯 기울어진 몸의 가장 앞부분.

기세 좋게 휘둘러진 왼손 끝에서 흰 공이 쏘아져나와 내가 들고 있는 미트에 빨려들어갔다.

"나이스 볼! 잡고 있는 곳으로 완벽히 들어왔네."

"헤헷, 그치"

내가 던져 돌려준 공을 스바루는 미소를 꽃피우며 잡았다.

 

 

 

 

2

 

8월의 어떤 이른 아침.

아침과 저녁에만 빌릴 수 있는 중학교 그라운드에는 나와 스바루 뿐이었다. 아직 해가 뜬지 얼마 안 되어 햇살은 약하고 시끄러웠던 매미소리도 지금은 조용했다.

"다음은 슬라이더야!"

마운드 위의 스바루와 홈베이스 뒤에 앉아있는 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18.4404m.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 규슈의 한 섬에서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방금 스트레이트를 던졌을 때보다도 좀 더 휘두른 자세에서 공이 던져졌다.

나를 향해 곧바로 날아오던 공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히기라도 하듯이 홈베이스 앞에서 꺾여 허리 높이에 든 미트에 꽂혔다.

그 순간 어떤 풍경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폭염속 직사광선에 끓어오르는 구장, 그 다이아몬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는 쭈그려 앉아있었다.

구부린 양 무릎 사이에 야구 방망이를 끼워 기둥처럼 지탱하며 다이아몬드의 꼭짓점에 선 타자를 보고 있었다.

내 표정을 보려면 거울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고 뭘 원하고 있었을까.

"성모의 아침 인사를 무시하다니, 배짱 한 번 두둑하시네요~"

갑자기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져 머리 속이 현실로 되돌아왔다.

"어이쿠, 미안. 멍하니 있었네. 안녕 토모카."

"프로듀서님, 좋은 아침이에요~"

어느샌가 내 옆에 선 텐쿠바시 토모카는 이 쪽을 압도하는듯한 압박감을 뿜으며 화려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토모카, 안녕!"

"스바루도 좋은 아침이에요~"

마운드 위의 스바루와 미소를 주고받는 토모카.

"슬라이더도 깔끔하네, 스바루."

칭찬과 함께 스바루에게 공을 돌려준다.

"……프로듀서, 괜찮아?"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스바루가 공을 받았다.

"괜찮아 괜찮아. 여름이라 몇 가지 떠오르는게 있었던 것뿐이야."

그렇게 말 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스바루는 계속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어느샌가 스바루의 옆에 선 토모카도 의아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멍하니 있었으니 걱정이 되는건 알겠지만, 이 회상은 그렇게까지 중요한건 아니다. 라고 나 스스로 생각했다.

일상생활에서 갑자기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어느 특정 순간에, 구체적으로 말 하자면 스바루가 던진 변화구 슬라이더를 받을 때만 옛 기억이 떠오른다.

그럴 때 스바루의 모습은 기억 속에 남은 누군가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이제 슬슬 몸도 데워졌지. 전에 그거 도전 해 볼래?"

화제를 바꾸기 위해 '그것'을 스바루에게 제안했다.

"!"

그러자 스바루는 방금 전까지 구부리고 있던 눈썹을 펴며 눈빛을 반짝였다.

좋아, 잘 얼버무렸다.

의혹의 시선을 더욱 강하게 보내는 토모카는 쳐다보지 않도록 노력하며 스바루에게 집중했다.

'그것'이란 스바루가 현재 연습하고 있는 새로운 변화구, 커트볼이다.

커트 패스트 볼, 컷터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중간까지 스트레이트와 같은 궤도와 속도로 날아가지만, 타자 앞에서 조금 휘어지는 강력한 변화구이다.

스트레이트라고 생각해 친 타자의 예상을 빗나가게 만들 수 있고, 자세가 좋으면 헛스윙도 유도할 수 있는 공이다.

"……!"

작은 기합소리와 함께 기세 좋게 팔을 휘두르는 스바루.

방금 전까지 하던 부드러운 폼과는 다르게 지금은 뭔가 힘이 많이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

스바루의 손을 떠난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나 내 오른 쪽으로 날아갔다.

"하아…… 이상하네. 쥐는 방법만 바꾸고 스트레이트랑 똑같이 던질 뿐인데."

"잘은 안 되는 모양이네요~"

마운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스바루는 어깨를 떨어트리며 갸웃했다.

그 옆에서 토모카도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생각에 잠겼다.

"안녕하세요…… 셋 다 이르네요."

그러다보니 나나오 유리코가 눈을 문지르며 그라운드에 나와있었다.

어제도 밤 늦게까지 책을 읽었는지, 아직 졸려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 유리코! 나 좀 도와주라~! 커트볼을 잘 던질 수 있게 하는 책 읽은 적 없어?"

"…… ? 저기…… 여러 가지 변화구를 던지는 여성 프로 야구선수 이야기라면……"

마운드에 가까이 간 유리코는 스바루의 말도 안되는 요구에도 최대한 성실히 답변하고 있었다.

"굿모닝이에요……"

유리코에 이어 로코도 마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쪽도 꽤나 졸려보인다.

"안녕하세요~♪ 어머, 아직 머리가 흐트러져있네요~"

"토모카, 땡스에요……"

마찬가지로 마운드에 다가가는 로코의 머리카락을 토모카가 상냥하게 만져준다.

극장의 동갑내기 4인조는 오늘도 사이가 좋은 것 같아 다행이다.

마운드에 모인 화기애애한 네 사람을 나는 홈베이스에서 멀리 지켜보고 있었다.

근처에서 조금씩 매미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며, 햇빛도 점차 열기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오늘도 새로운 여름 하루가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3

 

우리가 규슈의 섬에 도착한 것은 어제 저녁쯤이었다.

"~! 바다 냄새 난다~!"

공항 입구에 나오자 스바루는 기분 좋은듯 기지개를 폈다.

"도쿄 공항과는 또 다른 정취가 느껴지네요~"

"THE 섬나라 라는 분위기가 너무 좋네요! 아아~ 청춘 소설의 발소리가 들려오네요!"

온화한 바닷 바람에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속삭이듯 웃는 토모카와, 콧바람을 뿜으며 여기저기 둘러보는 유키로.

"……♪"

로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노스탤직한 분위기에 인스피레이션을 자극당한걸까.

각자 자기만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 네 사람의 소녀를 지켜보며 택시를 불렀다.

765프로덕션 라이브 시어터의 여름 방학 공연이 일단락 지어진 8월 중순, 오토나시 씨에게 유급휴가를 쓰지 않으면 난처하다는 이야길 듣고 주말을 껴 4일 연휴를 만들게 되었다.

연휴를 맞이하는 것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모처럼이니 34일로 여행을 다녀오려고 휴가 계획을 시어터에서 짜고 있자,

"프로듀서, 섬에 가?"

로코, 유리코, 토모카와 이야기 꽃을 피우던 스바루가 흥미를 내비쳤다.

목적지 섬에 대해 알려주자 스바루의 눈빛이 점점 더 반짝였다.

다른 세 사람은 이야기에 끼지는 않았지만 힐끔힐끔 이 쪽을 엿보는 것이, 우리 이야기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좋겠다~! 나도 거기 가 보고 싶어."

그러고보니 스바루와 로코, 유리코, 토모카도 같은 일정으로 휴일이었다.

"그럼 같이 갈래? 거기 세 사람도 괜찮다면……"

"신난다! 갈래 갈래!"

" " "갈게요." " "

내 제안에 시원스레 대답한 스바루와, 거침없이 대답하는 로코, 유리코, 토모카.

스바루 외의 세 사람에게서 의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도시의 소란으로부터 떨어져 자연 속에 두 사람만……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리가 ㅇ벗어요……"

"프로듀서랑 트립…… 에헤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비행기 예약을 해 둬야겠네요~"

양 손을 뺨에 갖다대고 뜨거운 표정으로 망상에 빠진 유리코.

가지고 있는 연필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기쁜듯이 웃음짓는 로코.

평정심을 가장하면서도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손놀림이 빨라져 두근거림을 숨기지 못하는 토모카.

"있잖아, 프로듀서."

그런 세 사람을 놔두고, 스바루는 평소와 변치 않게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괜찮을까?"

 

 

공항에서 택시로 숙소로 옮겨 짐을 내려놓고 산책을 좀 하니 시간은 저녁이 되었다.

나와 스바루는 캐치볼을 할 수 있는 공원을 찾았지만, 숙소 근처에는 괜찮은 시설을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찾았던 곳이 지역의 중학교 운동장 뿐.

둘러싸인 울타리 앞에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자,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중학교 교장이 말을 걸어왔다.

게다가 우연히도 토모카의 팬이라고 한다.

성모의 위광은 남녀노소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닿고 있는 모양이다.

무서워라.

친절하게도, 교장은 아침과 저녁시간이라면 운동장을 써도 된다고 허가를 내 줬다.

아무래도 그런 호의를 받아도 될까 싶었지만, 토모카의 사인을 받고 기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되겠다 싶었다.

그렇게 되어 결국,

"간다, 프로듀서!"

스바루가 던진 공을 내가 미트로 받는다.

이건 나에게 있어서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여행 전에 스바루에게 부탁받은 것. 그것은 새로운 변화구인 커트볼 연습이었다.

아무래도 몰래 익힌 다음 반 친구들을 놀래켜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걸 위한 비밀 특훈을 여행중에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긴 평상시 나와 스바루는 캐치볼이나 야구 연습을 하고 있지만 그 때는 서로 시간을 맞춰야만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루 종일 함께 있다면 시간은 얼마든지 맞출 수 있겠지.

나도 이렇게 스바루가 던지는 공을 받는 건 즐거우니까, 그런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우연이긴 했지만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런 장소는 언제 이후로 와 보는거지.

야구부였던 중학생 시절이 마지막이었지.

"유리코, 파 어웨이에요~!"

"아앗! 미안해~!"

저 쪽에서는 로코, 유리코, 토모카가 삼각형 모양으로 서서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마침 유리코가 로코에게 폭투를 던진 모양이다.

멀리 굴러간 공을 쫓아가는 로코를 향해 유리코는 손을 맞대고 사과 표현을 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토모카는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 어렵네~"

한 편 스바루는 커트볼을 잘 던져지지 않아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커트볼을 던지는 방법 중 일반적인 것은, 쥐는 방법만 스트레이트와 다르게 하여 같은 방식으로 던지는 것이다.

실제로 커트볼을 던질 때 스바루의 팔 움직임은 스트레이트 때와 같아보였다.

하지만 뭔가 던져진 공은 쑥 빠지면서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스트라이크 존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말았다.

"우선 슬라이더로 확인 해 볼래?"

", 시험 해 볼게."

무작정 던지기만 해서 느는 것도 아니었으니, 우선 커트볼과 비슷한 궤도로 변화하는 슬라이더로 손 끝의 감각을 확인하고자 했다.

우리들이 마주보고 있는 운동장은 점점 떠오르는 서쪽 햇빛으로 물들어갔다.

들리는 것은 작게 우는 쓰르라미 소리뿐.

그런 풍경을 중학생 시절에 몇 번이고 봤었지, 그런 생각이 들자, 자세를 잡는 스바루의 모습에서 나도 잘 아는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

유연하게 휘두른 스바루의 왼팔에서 던져진 공이 스트레이트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 휘어지며 내 미트로 빨려들어간다.

그 찰나에, 내 시야가 한 번에 뒤바뀐다.

……여긴 구장이었나.

그라운드에는 수비에 들어간, 흰 유니폼을 입은 9명의 선수들이 검은 옷을 입은 4명의 심판과 섞여있었다.

강한 여름의 햇빛이 신기루처럼 그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흰 유니폼과 검은 옷이 섞인 가운데 홀로 하늘색 유니폼을 입을 소년이 있었다.

그는 좌타석에 올라 투수가 던진 공을 필사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

그 녀석은 분명……

"프로듀서!"

"으앗!?"

눈치채고 보니 스바루의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다른 세 사람도 홈베이스 뒤에 쭈그려 앉은 내 얼굴을 걱정된다는 듯이 엿보고 있었다.

"왜 그래, 일사병이야?"

스바루가 더욱 얼굴을 가까이 해 서로 닿을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괜찮아. 잠깐 이게 좀……"

우선 가까이 다가오는 스바루로부터 떨어져 천천히 일어섰다.

난감하네.

설명하려고 해도 나 자신조차 무슨 일이 벌어진지 잘 모르겠다.

"플래쉬백? ……같은거야. 예전 일이……"

아니지, 그보다는.

"아니, 소중한 사람이…… 인가."

소중한 사람. 풍경은 어슴푸레했지만 그 타석에 섰던 소년은 나에겐 소중한 사람이었다.

어째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사람……"

내 말을 듣고, 스바루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 편 다른 세 사람은

" " "……" " "

스바루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토모카는 평상시의 둥글고 귀여운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뭔가 생각에 빠진 것 같고, 유리코는 이 세상이 다 끝장난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로코는 눈가를 글썽거리며 매달리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왜 그래?"

"……! ,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기, , 토모카, 로코, 잠깐 괜찮을까?"

유리코가 그렇게 말 하자 토모카와 로코가 몸을 일으키고는 뭔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남겨진 스바루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며 왼 손으로 공을 만지작거렸다.

왠지 분위기도 이상해져서,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기로 했다.

평상시엔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먼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방금 본 풍경과 합쳐본다.

그 해 여름은 어땠었지.

 

 

 

 

4

그렇게 하루 밤이 지나고 여행 이틀째인 오늘.

아침 연습을 마치고 우리는 렌터카를 빌려 섬 뒤편의 해변으로 향했다.

"대박~! 물이 투명해서 바닥이 다 보여!"

", 스바루, 스윔 웨어가 아니니까 조심해야…… 꺄악."

맨발로 첨벙첨벙 바다를 뛰노는 스바루를 쫓아가며 로코가 모래에서 미끄러졌다.

"로코도 조심해요~"

뒤이어 토모카가 몸을 붙잡아줘 넘어지지는 않았다.

", 땡스에요 토모카!"

부끄러운듯 대답하는 로코에게 토모카가 상냥한 미소를 보낸다.

"끝없이 보이는 오션 블루……! 당장이라도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아요……!"

유리코는 물가에서 칠칠치 못한 표정을 지으며 망상에 빠졌다.

"……"

그런 유리코를 보던 토모카는

"……에잇♪"

바닷물을 떠서 촤악하고 유리코의 얼굴에 뿌렸다.

"꺄악!? , 토모카?"

"성모 앞에서 틈을 보이다니, 방심했군요~"

당황한 유리코를 보며 토모카가 쿡쿡 웃는다.

이렇게 나이에 맞는 표정을 짓는 모습은 평상시에는 별로 보여주질 않아서 보고만 있어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지어지고 말았다.

"헤헷, 토모카도 틈이 많은데! 이얍!"

"꺄악스바루, 성모에게 싸움을 걸다니 후회 안 할 자신 있으신가요~?"

", 그러니까 스윔웨어가 아니니까 너무 익사이트 했다가는…… 어푸푸"

나는 꺅꺅대며 서로 물을 뿌리기 시작한 네 사람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았다.

이 곳이 내가 항상 있는 위치다.

모래사장에 시트를 펴고 앉아 타올을 머리에 얹고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그 날 하늘도 이런 느낌의 푸른 하늘이었지.

중학생 시절, 나는 야구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포지션은 포수.

야구를 시작했던건 초등학생때부터였고, 당시에 배터리를 꾸렸던 투수는 초등학생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래, 기억났다.

어제부터 가끔 일어난 플래시백에서 타석에 서있던 소년은 배터리를 꾸렸던 그 녀석이다.

그건 중학교 3학년 때 마지막 시합, 지역 대회 결승전.

나도 열다섯 번째 여름이었다.

"프로듀서님은 항상 거기 계시네요."

갑자기 들려온 부드럽고 고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토모카가 내 오른편에 앉아있었다.

"저희랑 좀 같이 어울리시는건 어때요~?"

오늘 토모카의 의상은 흰 블라우스에 하늘색 플리츠 스커트.

물장난도 했고 땀도 흘려서인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블라우스가 비쳐 피부가 보였다.

"……왠지 나쁜 시선이 느껴지는걸요~?"

어이쿠,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당황해서 시선을 돌리자 저 쪽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는 스바루, 로코, 유리코에게 시선이 갔다.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스바루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팔을 붕붕 휘두른다.

그에 맞춰 흔들흔들 팔을 흔들며 토모카가 온화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어제는 솔직히 좀 의외였어요. 프로듀서님이 옛날 이야기를 말 하실 줄이야."

하긴 나는 옛날 이야기는 남에게 잘 하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단 과거에 잘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는 표현이 맞나.

"프로듀서님은 옛 일에 집착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그렇지."

"그렇게까지 인상깊은 사건의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거죠."

토모카의 표정에는 웃음기는 없었고 진지한 눈빛을 여름 하늘을 향해 보내고 있었다.

"그 소중한 사람 말인데……"

토모카는 나의 소중했던 사람, 중학생 시절 배터리를 꾸렸던 그 녀석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꽤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알려주는 편이 낫겠지……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토모카가 하려던 말을 제지했다.

"그건 프로듀서님의 소중한 추억이니까 머리 속에 잘 간직해 주세요."

쓸쓸한듯, 하지만 상냥하게 웃으는 토모카에게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 조금 마음이 아프지만 토모카의 호의를 받아 묻어두자.

실제로 그 일에 대해서는 조금 말 하기 어렵기도 했다.

오히려 나 자신도 그 날에 벌어진 일에 대해 배터리를 꾸렸던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까.

"프로듀서님, 이건 분명 당신에게 정말로 소중한 추억일거에요. 그러니까."

토모카는 내 뺨에 손을 가져다대고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제대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답을 내고, 받아들여주세요.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도요."

 

 

해변에서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다.

거울 너머로 보인 뒷좌석에는 토모카가 양쪽 어깨를 스바루와 로코에게 내주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들과 함께여서 그런걸까. 오늘따라 유독 더 신나게 놀았었지.

피곤하겠지.

양 옆의 스바루와 로코도 완전히 잠들었다.

깨어있는 것은 차를 운전하는 나와, 조수석에 앉은 유리코 뿐이다.

"왠지 단 둘이 있는 것 같네요…… 에헤헤."

뒤에서 자고 있는 세 사람을 깨우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유리코가 말했다.

방금 전까지 신나게 떠들며 놀았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얌전했다.

피곤해서 그런것 같지는 않았다.

"프로듀서님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어요."

조수석 창문 너머로 흘러가는 해안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프로듀서님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랑 거리를 두고 있는것처럼 보였으니까요."

정곡을 찔렸다.

토모카도 그렇지만 유리코도 참 사람을 잘 파악하고 있네.

"……좀 아쉽네요. 제가 프로듀서님의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뺨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유리코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심되기도 했어요. 프로듀서님도 그런 분이셨구나, 해서요."

시선을 내 쪽으로 옮긴 유리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왜냐면 그리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건 쓸쓸하잖아요."

"……, 그렇지."

나는 유리코의 따뜻한 미소에 얼버무리는듯 애매한 답변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배터리를 꾸렸던 그 녀석에 대해서 유리코에게는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지.

왜 이제 와서 그 녀석을 이렇게 떠올리게 됐을까.

토모카도 그렇게 말 했으니, 좀 더 깊게 과거를 돌이켜보도록 해 보자.

 

 

 

 

5

 

과거는 지금의 나를 만드는 토대다.

과거에 겪은 일, 사람들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리가 없다.

그 점은 알고 있다.

다만 굳이 지나간 일을 되짚어 상기시킬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중학교 시절 수험에 실패했던 일, 1지망 고등학교에 떨어진 일,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임한 모의고사 성적이 목표치에 턱없이 부족했던 일, 의학부 시험을 포기했던 일, 아버지가 실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던 일.

무엇 하나 떠올리면 기죽는 일뿐이었고, 나를 진취적으로 만들지도 못했다.

그 플래시백을 통해 나타난 기억도 그 중 하나였다.

중학교 최후의 대회, 8회초, 점수는 2-0으로 2점 리드당하고 있던 상황.

에이스 6번타자였던 그 녀석이 끈기있게 사구로 출루하고, 투아웃, 2루타나 장타가 나오면 동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그 시합의 유일한 기회, 그 타석에 7번타자로 섰던 나는 결국 숏 플라이를 쳤고 그대로 시합은 우리들의 완봉패로 끝났다.

이것도 내 인생에서 몇 번이고 있었던 좌절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랬을텐데.

"……읏차!"

과장된 기합소리와 함께 스바루의 왼손에서 공이 던져진다.

"아자!"

아침에 던졌던 폭투와 비교하면 스트라이크 존에 더 가까워지긴 했다.

"이얍~!"

하지만 아무리 해도 공이 휘질 않는다.

"~! 망했어! 쥐는 방법을 바꾸면 그냥 속도가 느린 스트레이트가 될 뿐이잖아!"

스바루가 마운드 위에서 머리를 감싸안는다.

저녁이 되어 우리는 다시 중학교 운동장에 나왔다.

목적은 물론 새 변화구인 커트볼 연습이다.

"있잖아,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스바루가 옆에 서있는 유리코와 토모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네요~ 저는 야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유익한 조언은 못 하겠지만요~"

"…… 이야기에서는 동료와의 인연이 주인공의 진정한 힘을 각성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인연…… 그래, 그럼 유리코가 나를 안아줘!"

"네에!?"

유리코는 몸을 일으킨 스바루에게 얼굴을 붉히며 저항하고 있었다.

"어머나~ 스바루도 대담하네요~"

그런 말을 하며 토모카도 은근슬쩍 유리코의 등을 밀고 있었다.

한 편, 로코는 어떻냐면

"……"

운동장 울타리 옆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스케치북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무언가를 그리고 잇었다.

아무래도 스바루가 야구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영감을 받은 모양이다.

"……해가 졌는데도 아직 덥네."

마운드 위에서 세 사람의 실랑이가 길어질 것 같아서 나도 벤치에 앉아 쉬기로 했다.

발 밑을 보니 운동장 흙은 이미 오렌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 풍경을 보고 있으니 중학교 시절 대회가 끝나고 그 날 저녁에 가진 마지막 미팅이 떠올랐다.

너희는 잘 했다는 감독님의 말에 다들 눈물을 흘렸다.

에이스였던 그 녀석도 울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불편해 계속 땅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열정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해도 열정이 이성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 시합도 그랬다. 반성은 했지만 후회가 남지는 않았다.

야구도 공부도 내 인생조차도 빠져들어 임하지 못했던 내가 아이돌 프로듀서라는, 남에게 꿈을 심어주는 직업을 갖다니 거 참 얄궂기도 하지.

성격이 이래서 인간관계도 제대로 발전하질 못했고, 유리코도 말 했듯이 타인과 거리를 두고 생활하게되었다.

"프로듀서, 왜 그래요? 타이어드한가요?"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겨있자, 옆에 앉아있던 로코가 걱정된다는듯 말을 걸었다.

"베이스볼에 컨센트레이션 하는건 좋지만 워터 보충도 잊지 말아요♪"

'헤헤'하는 의성어가 붙을 것 같은 티끌 하나 없는 로코의 미소가 저녁 노을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고마워 로코. 괜찮아. 수분 보충은 잘 하고 있고 그렇게 지친 것도 아냐."

"그럼 굿이에요♪"

내 대답을 듣고 로코는 만족스럽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있잖아 로코."

"?"

"로코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

아이돌 애들은 무기력한 내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물어본거였는데……

", 로코에게 프로듀서는 인터레스트 대상이고…… , 러브 같은 그런건……!"

내 물음에 로코는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 허둥대고 있었다.

"…… 미안, 말을 제대로 했어야했네. , 나는 좀 차가워보이잖아. 너희들의 동기부여에도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싶어서."

"……하긴 프로듀서는 패션이 넘치는건 아니지만 그 점도 퍼스널리티인걸요?"

진정된 로코는 다시 한 번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핫하진 않지만 웜풀한 프로듀서의 하트, 로코는 싫지 않아요♪"

로코는 에헤헤하고 웃으며 스케치북에 연필을 놀렸다.

웜풀…… 따뜻하다는건가.

"……그렇구나, 고마워. 로코는 상냥하네."

"……! 로코는 그…… , 노말이에요……"

스케치북에 얼굴을 파묻고 로코가 부끄러워했다.

어이쿠, 한창 때인 여자아이 상대로 내가 좀 예민하질 못했나보다.

"……프로듀서는."

스케치북에 얼굴을 묻은 채, 로코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프로듀서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로코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며 시선을 마운드 위의 세 사람에게 옮겼다.

", 스바루, 이 마법진을 향해 마구 소환의 주문을 외워주세요!!"

대체 어쩌다 저렇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운동장 모래 위에 육망성이 새겨져있었고 그 가운데 야구공이 놓여있었다.

", 주문!? 나 그런거 모르는데!?"

"그렇네요~ …… 천공기사단의 7계명이라도 읊어볼까요~?"

시끌시끌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과, 옆에 앉은 로코.

나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너희들은, 함께 있으면 즐거운 동료야."

또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렇군요. '소중한 사람'이라고는 말 해주지 않으시는거네요."

그렇게 말 하는 로코의 표정은 스케치북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로코나 스바루, 유리코, 토모카를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플래시백된 기억도 그렇지만 평상시 고민을 거의 하지 않는 성격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집요하게 내 과거와 현재를 마주하게 된다.

평상시엔 마음을 진정되게 만들어주던 잔잔한 쓰르라미 소리도 오늘은 유독 귀에 거슬렸다.

 

 

. 묵게 된 민박집 집주인 분이 수박을 잘라주셔서 마루에 앉아 먹게 되었다.

벌레 소리가 울리며, 하늘을 바라보니 은하수가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대박……"

"와아…… 도쿄에선 이렇게 예쁘게 보이지 않았는데요."

스바루와 유리코가 은하수를 보며 눈빛이 초롱초롱해진다.

로코는 저녁부터 계속해서 연필을 잡고 스케치북을 마주하고 있었다.

토모카는 그것을 미소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얼핏 만들고 있는 밑그림이 보였는데, 원이나 사각형같은 기하학적인 모양들이 잔뜩 나열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어떤 아트가 탄생될지 기대해보자.

"거문고자리의 베가,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 은하수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건 일 년에 단 하루뿐. 흔하면서도 왕도적인 연애 스토리에요……!"

금세 망상에 빠진 유리코 옆에서 스바루는 고민되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공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말야. 전에 같이 플레이했던 선배가 있는 고등학교가 올해 코시엔에 나가게 됐대."

스바루가 그런 말을 하며 공을 위로 던졌다.

"대단하지. 몇 천개 학교중에서 코시엔에 나갈 수 있는건 49개 학교뿐이잖아?"

떠오른 공은 순간 별 사이에 섞여들어갔지만, 금세 다시 스바루의 왼손을 향해 떨어졌다.

"나도 나가고 싶었는데."

스바루는 여학생이라 코시엔 그라운드에서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경기를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아무리 야구를 잘 하더라도.

"……"

다시 손에 쥔 공을 스바루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해 볼까!"

몇 초 정도 가만히 있다가, 스바루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고 공을 방금보다 더 높이 던졌다.

그 눈빛에 망설임 따윈 없다.

무엇을 위해 실력을 갈고 닦을지. 스바루는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겠지.

야구를 좋아하니까, 잘 하고 싶으니까 연습을 한다.

그 곳에는 어려운 이유 따윈 없을 것이다.

"프로듀서, 내일도 부탁해!"

엄지와 검지, 중지로 쥔 공을 나에게 뻗은 스바루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과 맞먹을 정도로 반짝이는듯했다.

 

 

 

 

6

 

나는 여름 아침을 좋아한다.

잠기운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눈부신 햇빛이 있지만, 밤에 간직해둔 서늘함도 남아있다.

그런 시원한 시간대가 기분이 좋았다.

아침 일과인 조깅으로 데워진 몸을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식혀준다.

"안녕 스바루. 오늘도 이르네."

운동장에 나가자 스바루는 이미 나와서 타올을 휘두르며 섀도우 피칭을 하고 있었다.

"안녕 프로듀서!"

내 목소리가 들리자 연습하며 나오던 진지한 표정에 금세 붙임성 좋은 미소가 꽃핀다.

이런 갭도 스바루의 매력 중 하나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해!"

아침 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몸을 풀며 캐치볼을 한 뒤, 바로 어제와 같은 투구 연습을 행한다.

스트레이트를 몇 개인가 던진 후, 평소대로 슬라이더를 던질 차례였다.

스바루가 던진 슬라이더를 포구하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예전 구장의 풍경이 플래시백되겠지.

대기타석에서 내가 봤던건 초등학생때부터 배터리를 꾸려왔던 친구, 팀 에이스 투수였다.

스바루와 같은 좌투수, 특기인 구질도 같은 슬라이더다.

구역 내에서도 톱클래스인 실력이었기 때문에, 포수로서 그의 공을 받는 나는 그 점을 남몰래 자랑거리로 여기고 이:ㅆ었다.

"……어이쿠 미안. 또 멍하니 있었네."

지금까지 빈번하게 느껴오고 있었더니 슬슬 익숙해진 모양이다.

금세 현실로 의식을 돌리고 스바루에게 공을 되돌려주었다.

"괜찮아, 천천히 하자니까."

스바루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거 프로듀서에겐 중요한거잖아?"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았지만 적당히 이해해 준 것 같다.

그럼 스바루 말대로 좀 천천히 생각해보자.

"……스읍, 하아."

심호흡을 하며 구름 한 점 없는 여름 하늘을 쳐다본다.

그 시합은 나에게는 야구 선수로서 마지막 시합이었다.

야구는 중학생까지만 하고, 고등학교부터는 공부에 집중해 의사가 되기로 했기 때문이다.

결국 공부는 잘 되지 않았고, 의학부 수험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런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깊이 남아있는 그 시합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역투를 보여주면서도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그럼에도 타석에 설 때는 공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에이스 투수를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었을까.

"……하아, 안되겠네. 생각이 안 난다. 스바루, 던져줄래?"

아무리 떠올려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 스바루의 공을 다시 받기로 했다.

어쩌면 이걸 계기로 뭔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 그럼 커트볼 간다!"

스바루는 오늘도 새 투구법에 도전한다.

역시 커트볼을 던지려고 할 때에만 이상하게 힘이 들어간다.

그 점을 알려줬지만 어디에 힘이 들어가는지 본인도 잘 몰라서 좀처럼 개선되질 않았다.

그러고보니 그 녀석과도 이렇게 비밀 특훈같은걸 종종 했었지.

이른 아침 운동장에 둘이서.

그 시간은 왠지 모르게 굉장히 재밌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스바루가 던진 공의 충격을 미트로 받아내며, 멍하니 떠올리고 있었다.

 

 

다른 세 사람과 합류해 오늘은 섬의 명소라는 등대를 방문하기로 했다.

"저 어느샌가 이세계로 전생한게 아닐까요?"

갑자기 입을 딱 벌리고 망상의 세계로 빠지는 유리코.

하긴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지.

"대박~! 게임 속 세상 같아!"

스바루의 말대로 게임 같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주차장에서 숲을 통해 꽤 먼 거리를 걷자 펼쳐진 것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해안선 일부가 돌출된 곳에 홀로 등대가 서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장소에서 좁은 길 하나만이 뻗어있었다.

이 광경을 보면 RPG의 숨은 보스라도 숨어있을 것 같다고, 유리코 같은 상상이 떠올랐다.

"끝없는 오션이에요……!"

"바닷바람이 기분 좋네요~"

등대가 있는 곳은 섬의 끄트머리이다. 그 앞은 바다와 푸른 하늘만이 넓게 퍼져있었다.

등대 아래서 바다를 바라보는 토모카와 로코의 머리카락이 불어온 바닷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얘들아~ 기념사진 찍자~!"

등대 앞에서 스바루가 그렇게 제안했다.

"좋아, 그럼 거기 근처에서 맘에 드는 포즈를 취해봐."

카메라는 물론 내가 들고 있었다.

찍으려면 역시 동갑내기 네 사람이 좋잖아.

"좋아하는 프로 야구선수 흉내를 내며 찍자!"

"그건 스바루 밖에 못하는데요…… 로댕의 '르 펜서' 포즈로 해요!"

"'생각하는 사람'이었던가? 좀 더 화려하게 황금야차를 재현해요! 칸이치가 성 위를 날아가는 장면이에요!"

"……평범하게 찍으면 안되나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토모카의 제안해도 극히 평범한 포즈로 사진을 찍게 되었다.

"찍는다~ "

" " " "치즈~!" " " "

셔터를 누르는 순간 스바루가 어깨를 감싸서 로코는 놀란 것 같았지만 싫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두 사람의 뒤편에서 유리코는 소심한듯 V자를 그리며 토모카에게 몸을 살짝 기댔다.

토모카는 그걸 피하지 않고 받아주고 있었다.

이래저래해도 결국 이 네 사람다운 사진이 찍혔다.

", 슬슬 갈까."

그 후에도 예정이 많았기 때문에 계속 여기 남을 수는 없었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려 발을 옮기려 하자,

"무슨 소릴 하시는건가요~?"

"아직 중요한 사진을 안 찍었잖아요♪"

등 뒤에서 양 팔을 붙잡혔다.

그대로 비틀거렸지만 양 팔이 부드럽게 감싸지며 몸을 지탱했다.

얼굴 바로 오른쪽에 유리코의 얼굴.

왼쪽에는 토모카의 얼굴이 있었다.

"그럼 찍는다~!"

스바루의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쪽으로 스마트폰을 뻗었다.

머리 뒤에는 아까부터 로코의 복실복실한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찰칵하는 셔터음이 들린 후 스마트폰 화면에 찍힌 사진은 만면에 웃음을 띈 소녀들 사이에 둘러싸인 한 남자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팔을 잡아 끌어서 죄송해요 프로듀서님."

"계속 눈치 없이 군 프로듀서님이 잘못한거죠~?"

유리코와 토모카는 그렇게 말 하며 숲에 난 길을 걸었다.

때때로 폭주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얌전한 성격인 유리코는 물론이고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면서도 항상 내 의지를 존중해온 토모카마저 이렇게 강인한 수를 쓸 줄이야.

꽤 놀랐다.

앞을 걷는 유리코와 토모카는 얼굴을 마주하고 쿡쿡 웃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게 이번 여행을 와서 그녀들과 찍은 첫 사진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 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7

 

이번 여행은 34일이다.

내일 점심 전에 비행기를 예약해 뒀으니 스바루의 비밀 특훈을 위해 남은 시간은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뿐이다.

스바루는 진지하게 새로운 투구법에 도전하고 있었지만,

"아 진짜~! 스트라이크가 들어가질 않네!"

완성되려면 아직은 부족했다.

며칠간 노력한 결과 어떻게든 휘어지게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가질 않는다.

"…… 프로듀서 말대로 힘이 너무 들어간 것 같은데 어디에 힘이 들어간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스바루가 고개를 갸웃하며 어깨를 돌렸다.

옆에서 토모카와 유리코도 이런저런 제안을 했지만 그럴싸한 제안은 없는 모양이다.

로코는 어제부터 여전히 벤치에 앉아 스케치북에 붓을 놀리고 있었다.

"좋아, 한 번 더……"

스바루가 마운드에서 팔을 휘두르는 순간 물방울이 콧잔등에 떨어졌다.

몇 초간 천천히 떨어지던 빗방울은 금세 큰 비가 되었다.

"꺄악…… 로코아트가 웨트하겠어요!"

스케치북을 가슴에 품은 로코는 운동장 옆의 체육용품 창고 지붕 아래로 달려갔다.

우리들도 같은 곳으로 우선 비를 피하게 되었다.

두터운 비구름 사이로 오렌지빛 석양이 조금씩 비치는 것을 보니 소나기는 금방 그칠 것 같다.

로코는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는데도 불구하고 스케치북이 젖지 않았는지 필사적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로코를 토모카가 손수건으로 상냥하게 닦아주고 있었다.

스바루는 손에 든 공을 따분한듯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유리코는 내 옆에서 뭔가 생각에 잠겼다.

"……프로듀서님. 로코가 뭘 그리고 있는지 아세요?"

"잘은 모르겠는데 그릴 때마다 스바루를 힐끔힐끔 쳐다봤으니까 스바루를 그리고 있는게 아닐까?"

"아마 그렇겠죠?"

유리코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스케치북이 무사하다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는 로코에게 말을 걸었다.

"로코, 잠깐 봐도 돼?"

", 드래프트는 조금만 더 하면 컴플리트에요♪"

로코가 펼친 스케치북을 유리코와 둘이 쳐다보았다.

,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등등, 기하학적인 무늬가 표면에 잔뜩 그려져있었다.

단순히 보면 의미가 없어보이지만, 시점을 전체적으로 확대해 보면 왼팔을 휘두르며 공을 던지기 진전의 자세를 하는 투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오, 대단한데……"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졌다.

"우후훗~♪ 스바루의 다이내믹한 자세를 일부러 심플한 심볼로 디스크라이브한거에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해설하는 로코의 옆모습과, 유리코의 얼굴에 이어 스바루의 모습이 보였다.

"프로듀서님, 뭔가 아시겠어요?"

", 그러게……"

이렇게 그림으로서 그려진 모습을 보니 스바루의 투구 폼을 정말 깔끔하게 알 수 있었다.

하반신의 사용법은 이상적이고, 상반신을 회전시키는 방법도 군더더기 없다.

왼쪽 팔꿈치 각도도…… ?

"이거…… 왼 팔꿈치 위치가 평소보다 더 낮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스바루도 신경이 쓰이는지 같이 스케치북을 바라보았다.

"그래?"

". 확신은 없지만 아마도……"

약간의 차이지만 너무 미묘해서 자신감을 갖고 말 하기는 좀 그렇네……

"그럼 동영상으로 확인 해 볼까요~?"

그렇게 말 하며 토모카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무래도 스바루의 투구 연습 도중에 투구 폼을 동영상을오 남긴 모양이다.

역시 토모카, 준비성이 좋아.

"이게 스트레이트고, 이게 커트볼이에요."

토모카가 보여준 동영상을 비교해보니 확실히 스트레이트와 커트볼에서 왼팔을 휘두를 때 팔꿈치 높이의 차이가 있었다.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미묘한 차이였다.

"이걸 고치면 잘 될까?"

", 아마도."

"진짜!? 땡큐 프로듀서! 로코도!"

"우후훗~♪ 이게 로코아트의 파워랍니다 스바루!"

하지만 정지화면을 보고 그린 것도 아닌데 이런 미묘한 변화까지 제대로 재현해 낼 줄이야.

어지간한 관찰력, 기억력, 표현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건 정말로.

"정말로 대단한데 로코."

진심으로 나온 칭찬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 에헤헤♪"

로코는 부끄러운듯하면서도 기쁜 듯이 눈매를 가늘게 떴다.

"유리코랑 토모카도 고마워!"

", 저는 아무 것도 안했는데요."

"이제 잘 됐으면 좋겠네요~"

어느샌가 소나기도 그치고 운동장은 오렌지빛 석양에 둘러싸여 있었다.

운동장이 어느정도 마를 때까지 섀도우 피칭으로 폼을 확인한 후, 드디어 실전이다.

"간다, 프로듀서!"

양 팔을 휘두르다가 오른팔을 쭉 뻗고 오른발을 내딛는다.

체중이 이동하는 기세를 이용해 상반신을 회전시키고, 오른팔을 강하게 휘두른다.

평소대로 힘이 적당히 빠진 투구폼이었다.

던져진 그 흰 공은 기세좋게 내 쪽을 향해 오다가, 홈베이스 앞에서 작게 꺾이며 당황해 움직인 내 미트에 다행히 빨려들어갔다.

"……스트라이크?"

마운드 위의 스바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스트라이크야!"

내가 그렇게 말 하자 스바루는

"~~~!! 해냈다!"

양 팔을 위로 뻗으며 온 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엑설런트에요 스바루!"

"대단해요~ 성모가 칭찬을 해 드릴게요~"

"해냈어요 스바루! 모처럼이니까 이름을 붙여요! 방금 생각한거지만 '탐미하는 장미의 성창~ 로젠 롱기누스~'는 어떤가요?!"

마운드 위에서 기쁨을 나누는 네 사람을 나는 홈베이스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 곳이 내가 있을 위치다.

내 위치니까, 나는 여기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도 어째선지 마운드로 뛰쳐나가고싶은 기분이 들었다.

"프로듀서, 이 감각을 잊기 전에 한 번 더 던질래!"

"……!"

결국 그 날은 해가 저물어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스바루의 공을 받아줬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데워진 몸이 밤바람에 기분 좋게 식어간다.

달빛이 비치는 숙소 한켠에서는 벌레 울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방금 전까지 네 사람의 소녀가 떠들썩하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조금 쓸쓸하게도 느껴졌다.

나는 홀로 마루에 앉아 오늘 몇 십 번이고 받았던 공을 쥐며 달을 쳐다보았다.

사흘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스바루는 스스로의 무대를 한 층 높였다.

그 끝없는 향상심으로 난관을 극복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강함이었다.

플래시백되며 떠올랐던 그 시합 상대는 지역 대회 우승 후보의 리더였고, 그를 상대로 에이스였던 그 녀석은 호투를 보여주며 2실점으로 막아냈다.

한편 타선은 상대 투수에게 꼼짝도 못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어느 누구도 승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만이 그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더라도 기억 속 나는 대기타석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승부사들이 맹렬히 싸우는 그라운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고, 결코 그 곳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시절, 내가 진심을 다해 승리를 바라며 타석에 섰다면 동점타를 칠 수 있었을까.

팀을, 에이스였던 그 녀석을 도울 수 있었을까.

"좋은 밤이에요 프로듀서님."

"유리코구나. 아직 안 자?"

"에헤헤, 자기 전에 조금 바람을 쐬려고요."

마루 옆에 모습을 나타낸건 파자마를 입은 유리코였다.

늘 땋고 있던 머리도 풀고 있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 그래."

유리코가 옆에 앉자 막 씻고 나와서인지 옅은 비누 냄새가 났다.

"왠지 파자마를 입고 프로듀서님과 함께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 나네요."

설레여 진정이 안 되는듯한 모습으로 유리코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내일은 이제 도쿄로 돌아가는거죠. 사흘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네요."

마루에서 밖으로 뻗은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유리코가 조용히 말했다.

"프로듀서님, 스바루, 토모카, 로코와 함께 지내니 정말로 재밌었고, 프로듀서님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고요."

끝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 녀석은 내 자랑거리였다.

재능이 넘치고, 무엇보다도 야구에 대해 한없이 진심을 다했다.

그 녀석과 배터리를 꾸렸기 때문에 아무 장점도 없었던 나에게 존재의의가 생겼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 '소중하다'라고 마음 속에서부터 생각했던 사람은 그 녀석 뿐이었다.

"프로듀서님! 역시 저는 그 사람에 대해서……!"

"프로듀서!"

잠시 고개를 떨구고 머뭇거리던 유리코가 나에게 뭔가 물으려던 찰나에, 스바루가 갑자기 찾아왔다.

"…… 스바루, 잠깐 기다려줄래. 유리코, 뭐라고 말 하려고 했어?"

"……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결국 유리코는 에헤헤 하며 얌전한 미소를 짓고 가버렸다.

"미안 유리코, 방해했네."

미안해하는 스바루에게 유리코는 웃어보였다.

"그런데 스바루는 무슨 일인데?"

"아 맞다. 프로듀서."

굽어있던 눈썹이 펴지며 표정을 다잡는 스바루.

보고 있는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게 되는 늠름한 자태였다.

"새 공이 실전에서 적용될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나랑 승부하자. 진심으로."

 

 

 

 

8

 

운동장을 빌린 중학교 교장으로부터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받은 소년용 야구 방망이.

내가 현역 당시 휘둘렀던 것보다 가벼울테지만, 야구 방망이 자체를 오랜만에 잡다보니 더 무겁게 느껴졌다.

프로듀서로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야구 연습장에도 갈 시간이 없었지.

당시에 몇 천 번, 몇 만 번이고 휘둘렀던 동작으로 방망이를 휘둘러보았다.

부웅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가 삐걱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이 먹었구만."

토모카가 들으면 패기가 부족하다며 한소리 들을 것 같은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시간은 이제 막 해가 뜨기 전이다.

아직 조금 어두운 운동장에 내가 방망이를 휘두르는 소리가 울렸다.

"굿모닝이에요 프로듀서"

"우왓!?"

휘두르기 연습에 집중하느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고 말았다.

", 안녕 로코. 꽤 일찍 일어났네."

"꼭 오늘 안에 로코아트를 컴플리트하고 싶었거든요……"

로코가 걸으며 크게 하품을 했다.

자세히 보니 눈 밑이 어둡다.

"혹시 잠 안 잤어?"

"…… 완성하다보니 이매지네이션이 익스플로전하는 바람에, 어느새 보니 아침이고……"

몸에 안 좋으니까 밤 새우는건 금지야 라고 잔소리를 해주려다가, 여름방학이고 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완성했으면 조금 자는게 나을텐데. 이렇게 빨리 나올 필요도 없었잖아……"

"그건 프로듀서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로코는 그렇게 말 하며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이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띄며 스케치북의 한 페이지를 펼쳐 보여줬다.

그 곳에는 어제 보여줬던 투구를 하는 스바루의 실루엣이 색칠되어 그려져있었다.

실루엣을 만드는 기하학적 모양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색이 입혀져 있어서 스바루의 모습을 생기있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세 사람의 소녀로 생각되는 모습도 있었다.

독특하게 땋은 머리를 한 쪽이 유리코이고, 경단 머리를 한 쪽이 토모카.

복슬복슬한 트윈테일을 한 쪽이 로코 자신이겠지.

그리고 그림 속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쭈그려 앉아 포수 미트를 잡고 있는 남성이 그려져있었다.

"……나도 그려져있네."

나는 애들 사이에는 잘 끼지 못했는데.

"오브콜스에요!"

불만스럽다는듯 뺨을 부풀리며 로코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최대한 발돋움을 해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깝게 붙였다.

그 순간,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딱 달라붙은 로코의 표정을 선명하게 빛냈다.

"왜냐면, 로코즈 파트너는 프로듀서 뿐이니까요♪"

그렇게 말 하는 로코의 미소는 빨려 들어갈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렇구나, 고맙다 로코."

"아뇨, 프로듀서도 항상 땡스에요♪"

자연스럽게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로코는 나를 받아들여주었다.

무엇에도 진지하게 임하지 못한 나를.

유리코도, 토모카도, 스바루도 분명 나를 받아들여주겠지.

남은건 나 자신이다.

그녀들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을지는, 내가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중학교 마지막 시합 때의 기억이 이제와서 다시 떠올랐다는건 지금이야말로 새롭게 태어날 때라는 의미겠지.

오늘 스바루와의 승부를 통해 새로운 내가 되겠다.

지금까지 무기력했던 내 모습을 잊고, 그녀들의 옆에 설 수 있는 내가 되겠다.

그 후 다른 아이들이 합류할 때까지 나는 방망이를 계속 휘둘렀다.

로코는 무작정 야구 방망이를 계속 휘두르는 내 모습을 생글생글 웃으며 계속 지켜보았다.

 

 

"안녕 프로듀서."

"안녕 스바루."

해가 뜨고 얼마 안 있어서 스바루가 운동장에 나왔다.

그 표정에는 평소와 같은 붙임성 좋은 미소는 없었다.

당연하지.

앞으로 나는 스바루와 진검승부를 펼칠 예정이니까.

워밍업을 하는 스바루의 당당한 옆모습을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몸가짐을 다잡게 되었다.

"그럼 내가 타자이고 스바루가 투수. 나머지 세 사람이 수비를 하는 1타 승부를 하면 되는거지?"

유리코와 토모카가 운동장에 나오자 드디어 승부를 할 준비를 마쳤다.

"응 좋아. 수비 할 사람이 적긴 하지만…… 투베이스 이상, 2루까지 가면 프로듀서가 이긴거고, 1루보다 앞으로 더 진루하지 못하면 내가 이긴걸로 하면 되지?"

"오케이, 알겠어."

승부 조건을 명확하게 다지고, 승부를 하려 했는데……

"저요! 진 사람에게 버, 벌칙 게임을 시키는건 어떨까요!?"

한껏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유리코가 제안을 해 왔다.

"벌칙 게임? 예를 들면?"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이 원하는걸 한 가지 들어주기! 같은거요."

벌칙게임의 정석이로군.

", 좋아. 그게 더 불타오르잖아. 해 보자."

스바루는 대담하게 웃으며 그 제안을 수락했다.

, 나쁘지 않지.

이 애들이 무리한 요구를 할 리도 없고.

" " "……" " "

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은 유리코와 로코의 의욕이 수상할 정도로 높았다.

유리코는 눈을 반짝이며 뭔가 중얼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로코는 방금 전까지 졸려보이던 모습은 어디갔는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 편, 토모카는 난처한듯이 웃고 있었다.

"좋아, 다들 수비에 들어가 줘!"

약간 불손한 분위기도 느껴졌지만, 스바루의 외침과 함께 승부가 시작되었다.

나는 새벽부터 계속 휘둘렀던 소년용 야구 방망이를 쥐고 타석에서 1루 방향 조금 뒤 편에 쭈그려 앉았다.

대기타석이 있는 자리다.

거기서 운동장을 지켜보니, 스바루가 1루를 맡은 토모카와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내야 수비를 맡은 로코는 2루 베이스에서 조금 뒤편에, 외야 수비를 맡은 유리코는 그보다 몇 미터 뒤에 있었다.

플래시백 기억 속 나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승부의 세계 그 밖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프로듀서, 준비는 됐어?"

"……응."

그러나 현실의, 지금의 나는, 천천히 걸어나갔다.

타석을 향해.

진검승부가 벌어질 세상으로.

"초구, 간다."

좌타자인 나는 좌타석에 서서 방망이를 고쳐잡았다.

앞에 둔 오른발은 투수 쪽보다 조금 더 바깥쪽에 둔다.

시야를 넓게 보기 좋은 오픈 스탠스라 불리는 자세이다.

크게 팔을 휘두른 스바루가 깔끔한 폼으로 초구를 던졌다.

공은 스트라이크 존 정가운데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며 방망이를 휘두른 순간, 공이 홈베이스 앞에서 살짝 꺾였고 방망이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원스트라이크지."

어제 스바루가 익힌 변화구, 커트볼이다.

벌써 익숙해진건가.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는다.

"스바루~! 나이스 피칭이에요~!"

내야에서 로코가 열심히 스바루를 응원했다.

2구째, 이번에는 공이 무릎 근처로 날아오다가 직전에 살짝 꺾였다.

이 공은 손이 나가면 안된다.

쳐 봤자 어차피 힘 없이 내야로 굴러가기만 할 것이다.

"방금은 어땠어?"

", 나이스 볼이야."

홈베이스 뒤편, 투수 대신 세워둔 그물망에 들어간 공을 주워 스바루에게 돌려줬다.

, 이제 수세에 몰렸다.

스트라이크가 하나 더 나오면 내 패배가 결정된다.

아직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이대로 그냥 지고 끝낼 수는 없다.

다음 3구째, 스바루가 던질 구질은 어느정도 예상이 됐다.

아웃코스, 스트라이크 존으로 날아오다 옆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겠지.

"스바루~ 앞으로 한 번이에요~"

토모카의 성원과 함께 스바루가 3구째 투구를 던진다.

공을 놓기 직전 왼 팔이 미묘하게 아까보다 더 떨어져있었다.

팔의 움직임을 보니 슬라이더다.

예상대로 공은 스트라이크존 밖으로 휘어져 빠져나갔다.

가만히 놔두면 그대로 볼이 되어 빠져나가겠지.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도 몸이 반사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려했다.

홈베이스 앞에서 공은 급격하게 휘면서 스트라이크 존에서 크게 벗어났다.

나는 어떻게든 방망이를 뻗어 공에 겨우 맞추는데 성공했다.

결과는 파울.

어떻게든 한 번 더 기회를 얻었다.

"……"

스바루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아쉬워하는듯했다.

방금은 정말로 위험했다.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날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몸이 움직여서 방망이가 나가고 말았다.

깔끔한 슬라이더란 바로 그런 것이다.

"……스으으읍……"

타석에서 심호흡을 한다.

, 다음이다.

지금까지 커트볼, 커트볼, 슬라이더였다.

다음은 슬슬 스트레이트가 올 차례겠지.

코스는 아마 방금 슬라이더가 왔던 곳 근처, 스트라이크존 바깥, 아웃 코스에 딱 붙은 곳.

"스바루~!"

로코의 응원도 열기를 띈다.

유리코가 얌전하네, 하고 생각했더니 외야에서 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바루, 여기서 끝내요~♪"

유리코와는 대조적으로 1루수 토모카는 평소대로 우아하고 당당하다.

야구가 그리 익숙하지도 않을텐데, 역시나 대담하다.

천천히 팔을 돌린 뒤 기세 좋게 앞으로 내딛는 스바루는 유연하게 상반신을 회전시켰다.

공을 던지기 직전의 팔 각도는 스트레이트……

아니다. 그게 아니다.

뭔가 다르다.

근거는 없지만 직감적으로 그리 판단한 나는 방망이를 쥔 양 손의 높이를 조금 더 낮게 고쳤다.

똑바로 아웃코스를 향하던 공은 직전에 약간 휘어져왔다.

평소보다 낮은 곳을 향해 있던 내 방망이는 겨우 그 공을 쳐냈다.

맞은 곳은 중간이 아니라 방망이의 거의 끄트머리.

힘없이 뜬 공은 2루 베이스 약간 오른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스바루는 날아가는 공을 눈으로 좇았다.

"로코!"

"……!"

2루 베이스 뒤에 있던 로코는 그 공을 필사적으로 쫓았다.

"아아아아아아……!"

하지만 아쉽게도 로코의 글러브는 공을 스치기만 했고, 타구는 로코와 유리코 사이쯤에서 바운드 되었다.

, 외야로 굴러갔으니 다음은 유리코 차례이다.

"……!"

유리코는 필사적으로 공을 쫓아 달렸다.

하지만 포구자세 치고는 허리가 높다.

이래선 잡으려고 한 순간 공을 뒤로 흘리게 되고 말 것이다.

"아앗!?"

걱정했던대로 공은 유리코의 글러브를 가볍게 벗어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 외야 먼 곳으로 굴러가고 말았다.

곧바로 스바루가 돕기 위해 외야를 향해 달렸다.

그 시점에서 나는 이미 1루를 돌고 있었다.

이대로 2루 베이스에 도착하면 내 승리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방금 전에 다이빙 캐치를 시도했던 로코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일어나질 않고 있었다.

"로코! 괜찮아!?"

2루 베이스 앞까지 온 나는 바로 소리를 질렀다.

설마 넘어질 때 머리라도 부딪힌게 아닐까.

"……으윽"

로코가 신음소리를 냈다.

이쯤되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으윽, 로코는…… 로코는……!"

하지만 가까이서 로코의 목소리를 들으니 아파서 신음소리를 낸게 아니라, 그저 일어나지 못 할 정도로 아쉬웠던 모양이었나보다.

"휴우…… 다행이다."

". 아웃이에요~♪"

"?"

안심하고 멍하니 한시름을 놓은 사이, 머리에 톡 하고 글러브가 닿았다.

얼빠진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바라보자,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는 토모카가 서 있었다.

"아웃이라니…… 공이 왔어?"

"~♪"

토모카가 보여준 글러브 안에는 공이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2루에 도착하기 전에 아웃됐다는건……

"내가 진거야?"

"저희가 이겼어요~♪"

"빅토리에요!?"

토모카의 승리 선언과 동시에 넘어져있던 로코가 기세좋게 일어났다.

얼굴에 머리카락과 모래가 엉켜있었지만, 기쁨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해냈다~! 이겼어!"

외야에서 여기까지 단숨에 뛰어온 스바루도 온 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방금까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것과는 반대로, 평상시에 보여주는 붙임성 좋은 미소로 돌아왔다.

"다행이다…… 내 실수 때문에 지는 줄 알았어요."

유리코는 내야쯤까지 와서는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구나…… 내가 졌구나."

결국 나는 승부에 철저하게 임하지 못했다.

승부보다도 로코에 대한 걱정이 앞서서 결국 지고 말았다.

오늘도 나는 변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낙담해야 할 부분일테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겼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계속 사과하는 유리코도, 그걸 달래는 스바루도.

"다치진 않았나요 로코~?"

"땡스에요 토모카! 로코는 노 프라블럼이에요!"

모래로 지저분해진 로코의 뺨을 손수건으로 털어주는 토모카도, 간지러워하는 로코도.

"……하하 ……하하하핫."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 않은 나도 모두 웃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 결과 승부에서 나는 결국 변한 것도 없고,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것도 마찬가지.

열정과는 연이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모두 함께 웃고 있다.

운동장에서 같은 무리 안에서.

"자 프로듀서님, 벌칙게임 말인데요."

스바루에게 할 사과는 끝났는지, 유리코가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 뭐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거였지."

완전 잊고있었다.

대체 어떤 요구를 해 올까.

네 사람의 소녀가 모여 짧은 의논을 한 뒤, 다시 유리코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 너무 가까우니까 그러지 말지.

"저희 부탁은 프로듀서님의 '소중한 사람'에 대해 알려주시는거에요!!"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토모카를 보니 죄송스럽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찮다고 눈짓을 보내니 난처한듯 웃었다.

걱정하지 마 토모카.

그렇게 말 하기 껄끄러웠던 것도 지금은 괘념치 않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소중한 사람'에 대해서라……"

"맞아요……!"

유리코는 눈빛을 반짝이며, 로코는 버려진 강아지처럼 불안해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토모카는 죄송스럽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가 할 이야기에 깊은 흥미를 내비치고 있었다.

스바루 혼자만이 상쾌한 표정이다.

"알려주세요 프로듀서님의 '소중한 사람'……"

"나도 궁금하긴 했지~"

스바루와 유리코가 동시에 나에게 물었다.

", 연인에 대해서……!" / "프로듀서가 배터리를 꾸렸던 투수 말이지?"

"그래그래. 내가 중학생때 배터리를 꾸렸던 녀석 말이지."

역시 스바루.

눈치채고 있었나보다.

스바루는 득의양양하게 웃음지었다.

그러고보니 유리코가 연인이 어쩌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리코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차라리 죽여주세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말았다.

귀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로코는 안심이란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편 토모카는 선 채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자세히 보니 목과 귀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 그렇구나.

이 애들은 사춘기에 할만한 착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 애매한 표현을 쓴 내 잘못이다. 그냥 넘어가주자.

"있잖아, 그 사람은 어떤 투수였어?"

"스바루와 같은 좌투수고, 슬라이더가 특기였어.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투수였지."

"~! 대박~!"

"그 녀석과 배터리를 꾸렸단 사실이 내 자랑거리야. 하지만……"

그건 이제 옛날 이야기다.

되돌아갈 수 없는 먼 과거의 이야기다.

"내 지금 파트너는 스바루잖아."

그렇게 말 하며 스바루의 머리를 톡 치자,

"……!"

스바루는 귀여운 미소를 꽃피우며 기운차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방금 타석에서 어떻게 커트볼을 친거야? 제대로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읽혔어?"

"아니, 나도 처음에는 스트레이트라고 생각했는데 던질 때 직감적으로 커트볼이라 생각했어. 그건…… 몸이 열리는 방향 차이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평상시 스바루에게서 공을 받다보니 알게 된거지만, 커트볼을 던질 때에는 팔이 좀 더 일찍 보인다.

그 순간에 판단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커트볼을 플라이로도, 내야 땅볼도 아닌 공으로 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몸이 열리는 방향이라. 그런 점에 차이가 있었구나."

여기서 스바루는 시선을 위로 올리며 말 했다.

"헤헤, 역시 프로듀서는 말야. 정말로 나를 잘 보고 있구나."

스바루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차분했다.

"좀 부끄럽긴 한데…… 엄청 기뻐♪"

희미하게 홍조를 띈 스바루의 얼굴에 천천히 피어난 귀여운 미소에 나도 모르게 설레이고 말았다.

"우린 최고의 배터리라고 생각해. 하지만 말야, 요즘 배터리 이상의 관계가 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잠깐잠깐.

스바루가 이렇게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애였나?

아까부터 생각이 따라잡질 못하는데.

"프로듀서, 이 마음이 뭔지 알아……?"

", 그건……"

"스톱! 이에요!"

갑자기 로코가 약한 태클을 걸어왔다.

"프로듀서는 로코의 아트에 대해서도 잘 보고 있죠? 그렇죠?"

로코는 내 팔을 감싸안고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매달린채 울먹이는 눈동자는 정말 엄청난 보호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로코에게 온리원인 파트너에요!"

그렇게 말 하며 한층 더 세게 끌어안는다.

"스바루는, 스바루만은 프로듀서님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을거라 믿었는데…… 완전히 노 마크였어요……"

유리코는 당황한듯 머리를 감싸고 중얼거리며 무언가 혼잣말을 하고 있다.

"귀여운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이다니, 팔자 참 좋으시네요 프로듀서…… 아니, 카사노바님~♪"

토모카는 나에게 수상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저건 화를 내고 있는…… 아니지, 뺨이 살짝 부풀어오른 것 같은데, 삐진건가……?

"있잖아 프로듀서. 가슴이 엄청 두근두근거리는데, 어떻게 하면 돼 이건……?"

"프로듀서! 프로듀서는 로코를 버리지 않을거죠? 그쵸?"

이제 해도 뜬지도 좀 되었으니, 햇살도 강하고, 매미 소리가 시끄러워지는 시간이다.

하지만 나느 그런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공간에 서 있었다.

 

 

 

 

9

 

공항에 도착해 짐을 맡긴 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몇 년만에 본가에 전화를 걸었다.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며 어머니에게 그 녀석의 지금 전화번호를 물으니,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와 살고 있으니 그 쪽으로 전화를 걸어보는게 어떻겠냐고 알려줬다.

그리고 그 녀석이 이미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조금 놀랐다.

전화를 걸어보자, 수화기로부터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근황 보고를 적당히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중학교 마지막 시합에서 승패에 전혀 집착하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때 일에 대해 사과를 하자,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라며 웃어 넘겨주었다.

그게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플래시백되었던 그 시합의 기억은 나의 '지금'과 마주하게 되는 기회가 됐다.

어떤 일에도 열정적이지 못했던 나도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할 수 있다고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알게 해 주었다.

내 성격상 그 감정이 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 아이들에게는 그 마음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다음에 고향에 돌아가면 같이 한 잔 하러 가자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고맙다'라고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안, 기다렸…… ."

"프로듀서님, 조용히 이야기 해 주세요~"

입 앞에 검지를 대고 토모카는 쉿, 하며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이런 별 것 아닌 행동에서도 자애로움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 역시 성모다운 부분인가.

공항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그늘 벤치.

전화하는 동안 네 사람은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스바루, 로코, 유리코는 잠들었나보다.

스바루와 로코는 서로 어깨를 기대고, 로코는 토모카의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기분 좋게 자고 있다.

에어컨이 켜진 곳에서 기다리는 편이 나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곳도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불고 있어서 나쁘지만은 않았다.

"출발 시간까지 시간이 있으니 조금 자게 놔둘까."

"그래요~"

"에헤헤…… 로코나이즈……"

긴장이 풀린듯 잠꼬대를 하는 로코의 머리를 토모카가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토모카는 피곤하지 않아?"

"아침부터 운동을 그렇게 했으니 아무리 저라도 조금 피곤하네요~ 그러니까……"

어깨에 부드러운 것을 놓는 느낌이 났다.

"어깨를 좀 빌릴게요~"

내 어깨를 베개삼아 토모카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1분도 지나지 않아 기분 좋게 자는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평상시에 의연하고 당당하던 토모카가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줄 줄이야.

신뢰받고 있다는 증거일까.

해가 들어오는 곳을 보니, 여름의 햇살이 나무들, 건물, , 아스팔트를 눈이 부실 정도로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근처에서 매미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

덕분에 귓가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토모카의 숨소리에도 평정심을 지킬 수 있었나보다.

스바루, 로코, 유리코, 토모카. 네 사람의 소녀의 자는 모습은 평온했다.

이 모습을 보면 이번 여행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몇 년, 몇 십 년 후의 미래에 그녀들은 어떤 식으로 추억하게 될까.

이 열다섯 번째의 여름을.